김찬선 신부

지지난 주에 네 살배기 아이를 둔 가정에 초대받아 갔습니다. 저뿐 아니라 여러 어른들이 같이 초대되었는데, 옛날 아이들과 비교할 때 요즘 아이들이 대체로 그렇지만 이 아이도 아주 영리해서 엄마의 머리 꼭대기에 있었습니다. 엄마와만 있을 때는 이룰 수 없는 것을 손님들이 있는 데서는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엄마와만 있을 때는 허락되지 않는 게임을 손님이 오면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거지요. 괜히 떼를 쓰고 떼를 들어주지 않으면 울고불고 하여 어른들이 대화를 할 수 없게 하는 거지요. 그러면 어른들이 대화를 하기 위해 평소에 허용치 않는 게임을 하게 해준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이 날도 결국 뻔히 알면서도 엄마는 이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얘기하는 사이사이 그 아이를 보니 시간이 늦을 때까지 내내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로 게임에 빠져 있는 거였습니다. 그 몰두가 정말 대단하다는 느낌마저 주면서.

또 다른 경우입니다. 그에 앞서 또 다른 가정에 초대된 적이 있습니다. 50대 아들을 둔 부부의 가정입니다. 저를 초대한 분들은 결혼도 안 한 이 아들이 큰 걱정입니다. 두 분 다 옛날 많이 배운 분들이고 유력한 분들이었는데 자녀 중 이 아들 하나가 늘그막까지 걱정꺼리입니다. 이 아들도 좋은 대학 나와서 우리나라 최고의 직장에서 생활을 했는데 직장생활 중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상처를 입고 대인기피증이 생겨 더 이상 정상적 직장생활을 할 수 없어 20년 넘게 백수로 살며 부모에게 얹혀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도 답답하여 저의 도움을 받고자 초대를 한 것인데 이 아들도 자기 방에 콕 박혀 게임만 하며 지낸다는 것입니다.

지하철을 탈 때마다 느끼는 것이 요즘은 젊은 사람, 나이든 사람 할 것 없이 스마트폰에 빠져 있다는 것이고, 그 중 상당수는 어른인데도 아직까지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한다는 겁니다. 책을 읽는 사람은 거의 없고 게임을 합니다. 책을 읽지 않는 사회. 게임에 빠져 있는 사회. 이것이 제가 요즘 보는 우리 사회 현상 중 하나입니다. 그러면서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되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는 의미로 살지 않고 재미로 사는 사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니까 제가 재미있는 사회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 재미있게 사는 것이 나쁘다고 제가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재미있게 살아야 하고 삶이 재미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도 잘 알다시피 어떻게 재미만 있을 수 있습니까? 실제로 우리의 삶은 그리 재미있지 않고, 재미있는 것보다 재미없는 것이 더 많으며, 고통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재미로만 살지 않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사실 재미는 우리 행복의 충분조건이 아니고, 우리 삶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재미지향적인 삶보다는 의미지향적인 삶을 살아야 나도 행복하고 사회도 건강해지지요. 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지만 행복이란 만족의 문제이고, 얼마나 두루 만족스럽냐에 따라 그만큼 행복의 질과 양이 달라지는 겁니다. 이것은 만족스러운데 저것은 만족스럽지 못할 경우 우리는 그만큼 행복의 결핍을 느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불만족스런 부분만 더 크게 느껴져 행복하지 않거나 불행하다고까지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재미는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것의 지극히 한 부분일 뿐 아니라 순간적입니다. 달리 말하면 행위 동시적입니다. 재미난 것을 할 때는 만족을 주지만 그것이 끝나는 순간 그 만족은 사라지고 심지어 허탈할 수도 있습니다. 인생을 허송했다는 허탈감 말입니다. 이에 비해 의미는 남는 것이고 지속되는 만족입니다. 재미와 의미 중에 뭘 선택해야 할지는 그러므로 자명합니다.

 

한국일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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