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를 바라보며, 현재를 거울삼아 과거를 통찰하며,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를 통해 더 나은 미래를 창출하는 수단이다.

오늘은 문화답사가 있는 날이다. 과거 우리 조상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현재의 우리들을 모습을 바라보며 미래를 위해 보존되어야 하는 문화유적을 만나는 일은 참으로 의미있고 흥미진진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문화답사는 대동면을 중심으로 우리 현재의 삶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보존되고 있는 대동향교와 주변 문화재를 답사할 예정이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날씨가 좋고 그다지 춥지 않다.

우리는 대동향교를 향해 출발했다.

향교는 유교문화 위에서 설립·운영된 교육기관으로, 국가가 유교문화이념을 수용하기 위해 중앙의 성균관과 연계시키면서 지방에 세운 것이다. 향교의 연원은 유교문화이념이 소개되는 때부터 비롯되지만, 향교가 적극적으로 설립된 것은 숭유억불과 유교문화이념을 정치이념으로 표방한 조선시대부터이다. 조선왕조는 유교문화이념을 수용하여 지방 사회질서를 유교문화 논리에 접목시키며, 과거제 운영을 유교 교육과 연계시키려 했다. 이러한 사회문화의 기초기구로서의 기능을 담당한 것이 향교이다. 따라서 국가는 군현제의 정비와 함께 지방 수령들에게

 

향교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보호·육성을 촉구했으며, 이를 위한 재정적 지원도 적극적으로 했다. 따라서 향교는 지방 수령의 책임하에 그 운영이 활성화되었다.

대동향교는 지어진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정유재란(1597)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선조 32년(1599)에 초가집으로 다시 지었으나 위치가 좋지 않다고 해서 인조 3년(1625)에 현 위치로 옮겼다. 지금의 건물들은 근래에까지 여러 차례 수리한 건물이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명륜당·동재·서재·내삼문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향교의 건물배치는 평지일 경우 제사공간이 배움의 공간 앞에 오는 전묘후학의 형식을 따르며, 경사지일 경우 배움의 공간이 앞에 오는 전학후묘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이곳은 흔치 않은 예로 전묘후학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노비·책 등을 지급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1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우리는 함평향교를 둘러보면서 조선시대 지방 양반가 자재들이 도포를 휘날리며 이곳을 누비며 공부에 매진했을 것 같은 상상을 해본다.

대동향교를 둘러보고 우리는 향교리 느티나무,팽나무,개서어나무 숲을 찾아갔다.

 

줄나무는 길가나 도로변에 줄처럼 길게 시어져 가로수 역할을 하는 나무들을 말한다. 향교리 줄나무는 향교초등학교 옆에 있는 옛날 도로변에 심어져 있으며 팽나무 10그루, 개서어나무 52그루, 느티나무 15그루와 푸조나무, 곰솔, 회화나무 각 1그루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나무의 나이는 대략 350살 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동면에 줄나무가 심어지게 된 것은 풍수지라학사 함평면 수산봉이 불의 기운을 품고 있어 그 재앙을 막기 위함이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줄나무는 무안 청천리의 팽나무와 개서어나무의 줄나무와 이곳 밖에 없다. 특히 이곳의 줄나무는 바다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으로부터 벌판과 마을을 보호하는 방풍림의 기능을 하고 있으며 우리 선조들이 자연을 이겨낸 지혜가 담겨있는 매우 중요한 문화적 자료가 되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겨울이라 모든 나무들이 옷을 벗고 있다. 아마 여름에 오면 이 모든 나무들이 초록옷을 풍성하게 입고 울창한 숲을 이룰 것이다.

나무데크가 설치되어 있어 함평군민의 쉼터와 산책코스로 이용되어 지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우리는 아차동 마을의 미륵할머니 전설에 찾아나섰다. 아차동 마을은 함평군 대동면 덕산리에 있는 마을로써 오랜 옛날 비올 듯 한 음산한 밤이면 마을 옆에 있는 대밭에서 소름끼치는 해괴한 울음소리가 들리곤 했다. 마을 사람들은 불길한 징후라 걱정들을 하면서 대밭으로 가봤으나 다른 것은 없고 미륵과 같이 생긴 바위만이 덩그러니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돌아서려는 순간 또 한 차례 울음소리가 들려 마을사람들은 하도 해괴하고 소름이 끼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제일 나이가 많은 할머니가 미륵바위 앞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엎드려 두 손 모아 빌기 시작했다. “미륵할머니 어리석고 죄 많은 저희 인간들을 가엾게 여기사 허물을 용서하시고 우시는 연유를 말씀해 주시옵소서” 하고 수없이 절을 했더니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그날 밤 그 할머니의 꿈에 미륵 할머니가 나타나서 “나는 너희마을을 지키는 미륵할머니다. 너희는 나를 너무 푸대접했느니라. 너희에게 부탁이 있다. 나를 아늑한 자리에 집을 지어 안치해 주면 너희 마을은 모두 재액이 없으리라”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다음 날 마을 사람들은 꿈 얘기를 듣고 의논하여 미륵할머니 바위를 대밭에서 옮겨 좋은 자리에 제당을 지어 안치시 키고 매년 음력 1월 14일에 음식을 장만하여 정성스레 제사를 지냈는데 그 뒤부터는 마을에 아무런 재앙이 없었다고 한다.

미륵할머니의 전설은 어떤 마을에서도 있을 법한 전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전설의 의미를 되새기고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탄스러운 일이다. 물질문명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조상들의 지혜를 엿보게 하며 전설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우리는 미륵할머니의 전설을 뒤로 하고 월산사를 찾아나섰다.

 

대동면 향교리 남교마을 426번지에 소재한 월산사는 충무공 이순신과 칠실 이덕일을 제향했던 곳으로 최초 건립의 단서가 마련된 것은 1712년 이덕일의 사당이 마을 북쪽에 건립된데에서 비롯된다. 1731년에 이르러 호남유림과 태학 유생들이 칠실 이덕일과 충무공 이순신이 왜란중에 세운 공과 그들의 인연을 내세워 유적과 가까운 이곳 함평 월산에 충무공 이순신을 주벽으로 하여 이덕일을 배향할 것을 건의하여 현재의 유적지에 월산사라 개칭하였다.

 

기대를 안고 찾아간 월산사는 잡초가 무성한 내버려진 체로 있는 사당과 같았다. 한참 그곳을 둘러보며 처음 이곳이 지어졌을 무렵에는 많은 사람들이 정성을 드려 지었을 법한 사당건물이었을텐데 지금은 아무도 관리하지 않고 버려진 체로 그저 관심이 전혀 없어져버린 사당처럼 보였다.

못내 아쉬움을 가지고 우리는 월산사를 내려왔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금산리방대형고분을 찾아나섰다. 네비가 가르쳐준대로 찾아가니 과연 높은 봉분을 가진 묘지가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고분앞에 서 있는 안내판에 금산리방대형고분이 아닌 죽암리고분이라고 안내하고 있다.

죽암리고분은 1994년 1월 31일에 전라남도 기념물 제152호로 지정되었다. 수량은 1기로 함평읍·손불면·신광면이 교차되는 떼등이라 불리는

낮은 구릉 말단부에 위치한다. 현재는 넓은 농경지가 바라다 보이지만 바닷가에 제방을 쌓기 전에는 바닷물이 이 고분 앞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죽암리고분과 같은 장고분(長鼓墳)은 영산강유역에서 10여 기가 발견된 바 있다. 그 가운데서도 이 죽암리고분의 규모가 가장 큰 편인데 당시 영산강유역에서 성행하였던 널무덤이나 독무덤과는 전혀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산강유역의 고대사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이 고분의 축조시기는 여전히 마한의 토착세력이 존재하던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중엽 이전으로 추정된다.

우리는 죽암리고분을 끝으로 문화답사를 마치고 돌아왔다. 우리 주변을 조금만 돌아보면 이렇게 손쉽게 볼 수 있는 문화유적이 많은 대동면이 축복받은 고을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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