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벽사

한옥마을의 정겨움과 다양한 문화유적에 취할 모평마을을 향해 가는 우리의 발걸음은 기대에 부풀었다. 가는 동안 내내 우리가 둘러볼 장소를 이야기하며 모평마을 이야기꽃을 피웠다.

모평마을은 조선 세조때 윤길(尹吉)이 무오사화에 연루돼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이 마을의 산수에 반해 정착하면서 파평윤씨 집성촌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모평마을에 도착했다. 모평마을은 뒤쪽으로 아담한 산새를 자랑하는 임천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앞쪽으로는 평야가 펼쳐져 있었으며 한옥집들이 나열되듯 자리잡고 있는 아주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으며 마을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우리는 나들이를 하듯 모평마을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모평마을은 늦은 가을이 짙게 내려 앉아 있었다. 산에는 울긋불긋했을듯

임천정사

한 단풍들이 지기 시작하고 군데 군데 보이는 오래된 고목들은 잎사귀를 떨군지 오래되어 보였다.

우리는 예전에 전통찻집이었다는 영양제를 찾았다. 영양재는 조선시대 천석꾼인 윤상용이 건립한 정자로 모평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도록 마을 뒷산인 임천산 산책로 입구에 자리하고 있었다. 영양재 옆으로는 임천산 산책로가 있다. 참나무, 편백나무, 삼나무가 우거진 길을 지나면 왕대나무 검푸른 죽림에 야생녹차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어느 한때 이곳이 많은 사람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전통차를 음미하며 모평마을의 역사와 전통을 이야기하던 곳이 아니었을까 상상해보았다. 지금은 영양제의 문은 열쇠로 굳게 닫혀 있었고 인적은 없다. 아쉬움이 일었다. 잠시 앉아 전통차를 마시며 모평마을을 음미하고 싶었는데 우리는 아쉽게 발길을 돌렸다.

안샘

우리는 마을 아래쪽으로 내려와 신천강씨 열녀각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신천강씨 열녀각은 정유재란 때 남편 윤해가 왜병에게 살해당하려는 것을 막으려다 함께 처참한 죽임을 당한 신천강씨의 정신을 기리는 비각이다.

그 옆으로 나란히 ‘충노(忠奴)도생비 충비(忠婢)사월비’가 있다. 사연이 특별하다. 신천강씨 부부에겐 성립·정립 두 아들이 있었는데 노비 사월과 사월의 남편 도생이 이 어린아이들을 충심으로 보살펴주었다고 한다.

잠시 머물러서 비각과 투박하게 남아있는 비를 바라보았다.

몇걸음 가지 않아서 파평윤씨 5대손인 고려 윤관 장군의 위패를 모신 ‘수벽사’가 있다. 윤관 장군은 본관이 파평(坡平)이고 자는 동현(同玄)이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문종때 문과에 급제하고 습유(拾遺)·보궐(補闕)을 거쳐 1095년(숙종 즉위) 좌사낭중(佐司郞中)으로 요나라에 파견되어

신천강씨 정려각과 충노도생비와 충비사월비

숙종의 즉위를 알렸다. 추밀원지주사·어사대부·이부상서 등을 거쳐 1104년 추밀원사로서 동북면 행영병마도통사(東北面行營兵馬都統使)가 되어 여진을 정벌하다가 실패하였다.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복주(福州)·길주(吉州)·공험진(公?鎭)·숭녕(崇寧)·통태(通泰)·진양(眞陽)의 9성을 쌓아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하고 이듬해 봄에 개선, 그 공(功)으로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문하시중(門下侍中)·상서이부판사(尙書吏部判事)·군국중지사(軍國重知事)가 되었다.

 

그 뒤 여진은 9성의 환부를 요청하며 강화를 요청해오자, 조정은 9성을 지키기 어렵다 하여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정세가 바뀌자 여진정벌의 실패로 모함을 받아 벼슬을 빼앗기고 공신호마저 삭탈되었으나, 예종의 비호로 1110년 수태보(守太保)·문하시중(門下侍中)·병부판사(兵部判事)·상주국(上柱國)·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었다.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우리는 수벽사의 내부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그분의 얼을 다시한번 상기하며 돌아섰다.

임천정사(林泉精舍)는 조선 중기의 문인 윤예형(尹禮衡 1522~1592)이 지냈던 곳으로 지금의 수벽사 옆에 일제강점기 때인 1937년에 재건되었다.

본관 파평. 자 경인(敬仁) 부사 사상(府使 思商)의 둘째 아들로 18세에 장성에서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성리학에 밝고 문장도 뛰어났으며 1582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의 가문은 장흥부사를 비롯 6군 수령을 지냈던 아버지와 6군 수령을 지낸 동생 인형(仁衡)이 모두 무과에 급제하여 무과 가문으로 이름이 높았다.

1589년에 명천부사(明川府使)로 부임하여 재직하고 있던 중 임진란이 일어났고 그는 경기 감사 심대(監司 沈岱)의 종사관이 되어 신출귀몰하는 전략을 세워 적에게 많은 손실을 주었다.

이 공으로 부원수(副元帥) 겸 선봉장이 되어 삭녕(朔寧), 철원(鐵原)의 전투에서 관군을 지휘하였으며 큰공을 세웠으나 전쟁중 전사하였다

우리는 수벽사와 임천정사를 돌아보며 모평마을의 역사와 유래를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관아의 우물로 사용되었던 ‘안샘’을 찾아나섰다. 천년에 걸쳐 마르지 않고 솟아나는 샘물로 지금도 식수로 사용할만큼 깨끗하다. 안샘 옆에는 약수바가지가 걸려 있다. 이곳을 오는 사람들에게 목을 축이고 가라고 말하는 듯 하다. 천년동안 이어온 샘물을 정결한 마음을 가지고 한 바가지 마셔보았다. 생각보다 시원하다. 영원히 이 샘이 마르지 않기를 기도해 본다.

우리는 늦가을의 정취를 한껏 느끼고자 마을숲을 향해 걸었다. 해보천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마을숲은 500여 년 전에 조성된 풍수비보림이다. 수령이 오래된 고목나무라기 보다 단단하게 한 자리에서 500여년을 버텨오면서 모평마을을 얼마나 든든하게 지켜왔는지를 보여줄 만큼 우람하고 단단하다. 한두 그루도 아닌 숲을 이루고 있는 그곳에서 잠시 쉬어본다. 늦은 가을 정취를 그대로 안은채 힘있게 서 있는 느티나무, 팽나무, 왕버들나무에게 나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잠시 침묵하며 기도해본다.

마을 숲 옆에는 물레방아간이 있다. 옛 방앗간의 형태로 복원되어 만들어진 듯 하다.

답사를 마치면서 우리는 모평마을 속으로 들어가 돌담길을 거닌다. 어릴적 초가집을 둘러싸고 있던 흙담길을 떠올려보며 추억에 잠겨본다.

모평마을은 환경부로부터 자연생태복원 우수마을로 지정되고 전라남도로부터 행복마을로 선정된 이후 많은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아마 한때는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아름다운 마을이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모평마을을 찾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왠지 오늘 찾은 모평마을은 쓸쓸해보이고 적막해 보였다.

천년역사를 가진 마을의 고풍스러움과 운치가 다소 삭감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영원히 남아서 우리의 전통과 역사를 계속해서 이어가는 아름다운 마을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름다운 산과 나무, 역사를 가진 모평마을 자체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영양제

모평마을을 돌아나오면서 다시 한번 마을을 마음에 담아본다. 늦은 코스모스 꽃 사이로 자리잡고 있는 모평마을의 정취는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특히 이 마을에서는 80년의 역사를 지닌 모평헌(募平軒), 소풍가(笑豊家), 희소문(喜笑門-영화황토민박집) 등의 한옥민박집에서의 숙박체험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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